세계 축구의 중심이면서, 최고의 선수들이 뛰고 있는 유럽무대, 빅무대에 등록된 1,000명이 넘는 선수 중, 최고는 과연 누구일까요? 한 해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는 발롱도르는 축구 인생 통틀어서 하나 더 들어 올리기 들어 올리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이 상을 6번이나 수상해, 축구의 신이라고 불리는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선수.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밸런스로 세계 최고의 드리블 능력을 장착한 드리블의 정석같은 존재. 축구게임보다 더 축구를 잘하는 선수. 축구게임보다 더 축구를 잘하는 선수.
스스로를 최고라고 하지 않아도, 모두 인정한 현재 진행형 전설의 선수. 오늘 소개해드릴 선수는 리오넬 메시 입니다. 리오넬 미시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메시의 모든 것이 궁굼하시다면, 아래를 확인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1987년 6월 24일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로부터 290km 떨어진 로사리오에서 태어난 메시의 아버지가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청소부였습니다.
아버지가 지역 축구 클럽의 코치였기에, 자연스럽게 축구와 가까워진 메시는 그의 4번째 생일날 축구공을 선물로 받으면서, 메시의 축구 인생이 시작됩니다. 맨땅에서 형들과 함께 놀았던 그 시간은, 메시 축구 인생의 최고의 수업이 되었다고 합니다.
형들의 기술을 모두 구사할 줄 알게 되었고, '넘어져서 불평할 시간에 빨리 일어나 달려가라.' 이 말이 메시 축구의 밑바탕으로 깔리게 됩니다.
1994년 7살이 되자, 메시는 스초프 센터에 등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곤 매주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1995년 로사리오를 연고로 하는 뉴웰스 올드 보이스 유스팀으로 입단하자마자 유망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날벼락처럼 날아든 '성장호르몬 결핍증'은 메시의 인생에 큰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치료비가 매 달 90만원씩 나가야 하는데, 힘들었던 부모님의 사정은로는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습니다. 메시가 하루에 10시간씩 축구 연습을 했던 이유도, 가난한 집안이 자기 때문에 돈이 들어가니, 축구 선수로 성공해야하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습니다.
1998년부터 의료보험금 혜택을 통해 치료를 받았지만, 이마저도, 2년만에 바닥이 나게 됩니다. 그러다 2001년 7월 그의 독보적인 재능을 눈치챈, 바르셀로나의 공식 제의가 들어오게 됩니다.
메시를 발견한 것은 바르셀로나의 전설적인 선수이자, 스카우터 카를레스 렉사흐였습니다. 렉사흐는 첫눈에 메시에게 홀렸고, 200년 한 레스토랑에서 가계약에 사용된 냅킨 한장은 아직도 전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 명문 리버플레이트도 그를 눈여겨 보았고, 제2의 마라도나라는 평을 내렸지만, 그를 지원할 돈이 만만치 않다는 점에서 머뭇거렸습니다. 그 사이 바르샤는 적극적인 어필로 메시와 아버지를 스페인으로 불렀고, 구단측은 메시의 치료과정에서 생기는 모든 비용을 지불하겠다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메시는 6년간 하루에 3번씩 매일 주사치료를 받게 됩니다.
입단초기 158cm였던 메시는 바르셀로나의 유스팀, 이름바 '라마시아'에 입단했으며 가족 모두 바르셀로나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158cm였던 메시는 호르몬 치료를 통하여서 169cm까지 성장 하였습니다.
입단 직후 메시는 기존의 바르사 영입정책을 완전히 바꾼 인물이었기 때문에 엄청난 주목을 받게 됩니다. 실력도 일취월장하며 빠른 월반을 통해서,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됩니다.
하지만 기존의 시스템에 반하는 외국인이라는 점이 발목을 잡아 유스A팀이 아닌, B팀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건드리면 부서질듯 가냘픈 체구였지만, 빼어난 재능으로 당시 피케, 파브레가스와 함께 공을 찼습니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았던 메시를 본 피케는 메시가 벙어리인줄 알았다고 하며, 파브레가스와 함께 위닝일레븐을 즐기다가 메시가 말을 할 줄 아는걸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2002년 메시가 이중국적을 취득하면서, 선수등록을 할 수 있었고, 2003년 11월 비로소 16세의 나이에 포르투와의 친선전에 첫 1군 데뷔경기를 가지게 됩니다. 매우 빠른 시기에 1군데뷔를 치뤄 보인도 놀랬지만, 같이 훈련한 호나우지뉴조차 놀라며 어쩌면 이 선수가, 자신을 능가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후네빌A에서 30경기 36득점을 올리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고, 2004/05시즌 바르셀로나B에서 활약하다 2004년 10월 예스파뇰과의 홈경기에서 첫 프리메라리가 공식 데뷔를 하게 되었습니다.
17살의 나이로 바르셀로나 역사상 3번째 어린 선수였고, 라리가 최연소였습니다.
이후 2005년 5월 1일 알바세테와 홈경기에서 호나우지뉴의 패스를 받아 데뷔골을 신고 합니다. 바르셀로나 최연소 득점기록은 이후 보얀이 깰때까지 메시가 가지게 됩니다.
당시 데뷔골을 어시한 호나우지뉴는 세계최고의 선수대열에 있던 선수였고, 교체로 들어온 메시를 보자, '내동생 데뷔골 챙겨줘야겠지?' 하는 식으로, 메시에게 많은 패스를 밀어줬다고 합니다.
제2의 마라도나라고 불린 많은 선수들이 존재하였습니다. 오르테가, 사비올라, 테베즈 등이 있었고, 그 호칭은 리오넬 메시가 바톤을 이어가게 됩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5년 청소년 월드컵이었습니다.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결승전 두 골을 포함하여, 총 여섯골을 기록하며 득점왕에 오르게 됩니다. 팀은 우승했고, 본인은 MVP까지 싹쓸이하는 3관왕을 달성하며, 전세계에 새로운 축구천재의 탄생을 알리게 됩니다.
이후 3년연속 월드사커 매거진이 선정한 최우수 유망주로 뽑히는 등 세계최고의 유망주로 인정 받았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 성인 국가대표 데뷔도 비슷한 시기에 하게 됩니다.
2005/06시즌
지울리와 함께 로테이션을 돌면서, 출전했지만 챔스나 엘클라시코에 등장한 것은 메시였습니다. 코파델레이 헤타페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62미터 드리블 골은 한상적이었으며, 매 경기 수준 이상의 경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챔스 16강 1차전 스탬포드 브릿지에서는 첼시의 로벤을 농락하며 상대선수를 퇴장시키는 활약으로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다음경기 2차전에서 부상을 당해 시즌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래도 재능을 알아본 많은 이들은 메시가 고작 18살이고, 어떻게 성장할지 기대가 된다며 잔뜩 부풀어오릅니다.
바르사는 첫 시즌 6골을 득점한 메시에게 큰 만족감을 드러내며, 이례적으로 2014년까지 계약을 체결합니다. 첫 월드컵 2006년 독일월드컵에 승선한 메시가 속한 아르헨티나는 네덜란드, 아프리카의 신흥 강호 코트디부아르, 스페인을 플레이오플 보내버린 세르비아와 조편성이 되었습니다.
이는 1994년 월드컵 이후 최악의 죽음의 조라 불린 조 입니다. 메시는 첫경기 코트디부아르전에선 벤치를 지켰고, 2차전 세르비아경기에서 팀이 대승하는 분위기에 교체로 나와 테베즈의 패스를 받아 월드컵 첫 골을 신고하게 됩니다. 팀이 8강까지 올랐지만, 메시는 사비올라의 백업 또는 벤치를 지키며 팀의 패배를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2006 월드컵이 끝나고, 네드베드, 지단, 카푸, 피구 등 스타 선수들이 축구계의 지는 해로, 리베리, 호날두, 루니, 메시가 뜨는 해로 세대교체가 일어나게 됩니다.
2006/07시즌
바르셀로나의 중심이 호나우지뉴에서 메시로 넘어옵니다. 호나우지뉴의 폼이 극심하게 무너졌기 때문에, 팀 성적도 말이 아니었습니다. 에투 또한 장기부상으로 시즌을 날렸고, 데쿠까지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19살의 메시는 혼자 고군분투하며 팀을 먹여살리는 소년가장이었습니다.
리그우승도 날아갔고, 챔스는 16강 광탈 속에 메시는 엘클라시코전에서 해트트릭을 이어나갔고, 이는 엘클라시코 역사상 최연소 헤트트릭이 되었습니다.
2007/08시즌
여전히 호나우지뉴가 훈련불참과 어긋난 행동등으로 팀원들조차 등을 돌려버렸고, 팀 성적 또한 지난시즌에 이어 악몽 시즌2를 이어가게 됩니다.
메시는 여전히 팀은 수습을 하면서 팀을 이끌었지만, 결국 챔스 16강에서 부상을 당하면서, 바르샤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우승은 당연히 물건너 갔고, 엘클라시코전도 처참하게 패배합니다.
챔스 4강이 되어서야 돌아온 메시는 박지성의 맨유를 만나게 됩니다. 박지성은 잠브로타와 데코를 완전히 봉쇄했고, 평점 8점으로 MOM을 받으며 바르샤를 무너뜨립니다. 바르샤는 비록 패했지만, 이때부터 메시는 호날두와 함께 라이벌 떡밥을 뿌리게 되면서 많은 팬들을 흥분시키게 됩니다.
시즌이 끝나고, 조국 아르헨티나를 위해서 소속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베이징으로 날아갑니다. 올림픽 멤버인 아구에로, 리켈메와 함께 브라질을 격파하고, 결승에서 디마리아와 환상적인 조합으로 베이징 스타디움에서 금메달을 목에 거는 영예를 얻게 됩니다. 사실 메시보다 디마리아의 활약이 빼어났지만, 어쨌든 이 둘은 올림픽을 계기로 절친이 됩니다.
2008/09시즌
팀 분위기를 와해시키는 호나우지뉴가 방출되고 과르디올라가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자, 메시는 전성기를 향해 달려나가기 시작합니다. 리그에서만 23골을 넣으며 찬사를 받았고, 챔스 결승에서 맨유 수비수들을 농락시키는 헤딩골을 작렬시키면서 바르셀로나 클럽 역사상 첫 트레블의 주인공이 됩니다.
2009년과 2010년 바르샤는 참가한 모든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리그, 챔스, 슈퍼컵, 코파 델레이등 들어올릴 수 있는 컵은 다 들어올렸고, 메시는 커리어 첫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됩니다.
22살의 메시는 바르샤의 중심에 있었고, 시즌 47골 13 어시스트로 마무리 합니다.
과거 호나우두 바르셀로나 기록과 동률이었지만, 2선에서 많은 활동을 더해, 상대 수비진을 농락하는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캄푸느에서 벌어진 아스날과 챔피언스 리그 8강 2차전에서는 혼자 4골을 넣는 충격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홀로 11명을 상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고, 이를 본 국내팬들은 곧 있을 월드컵에서 메시를 어떻게 막냐며 공포에 떨기도 하였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메시를 막기위한 세계각국의 노력들이 많았지만, 메시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수비를 피해서 동료들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며, 활약을 합니다. 그리스전에서 아르헨티나 역사상 가장 어린 주장을 맡아 뛰며 활얄을 했지만, 8강 토너먼트의 강자 독일에게 처참하게 0-4로 지게 됩니다.
독일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조직력은 아르헨티나에게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고, 메시는 답답한 마음에 하프라인까지 내려와 공을 받았지만, 독일은 아르헨티나의 약점을 철저히 파고들며 무너뜨렸습니다.
2010/11시즌
헤트트릭을 하며 산뜻하게 출발한 메시는 리그초반 16경기에서 19골과 7어시를 기록하며, 당시 침체된 리버풀 골 수의 두배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호날두와 치열한 득점왕 경쟁이 시작되었고, 2년연속 발롱도르 수상에 성공을 합니다. 월드컵의 부진이 있었기 때문에 수상논란이 있긴 했지만, 시즌 55경기 53골 24어시스트를 기록하였습니다.
40골의 호날두에게 리그 한 시즌 최다득점 타이틀은 넘겨주었지만, 팀이 3년연속 리그우승에 챔스우승을 달성하며 2관왕을 해내게 됩니다. 챔스 결승전에서 맨유 수비진을 부수면서, 후반 중거리슛 결승골은 인상적인 골로 남았습니다. 경기 최우수 선수에 성정되었음은 물론, 챔스 3년 연속 득접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 해 메시는 418억을 벌어들이면서, 최다수입 축구선수랭킹 1위에도 올랐습니다. 그전까진 베컴이 1위였습니다.
2011/12시즌
지난 시즌이 메시 축구 인생의 정점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이해 무려 60경기 73골을 넣는 한 시즌 최다골을 기록하면서 축구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됩니다. 마지막 골을 넣을 때, 셀레브레이션으로 스승 과르디올라 감독을 끌어안으며 고별 선물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챔스 16강 레버쿠젠전에선 무려 5골을 넣는 무자비한 모습을 본 팬들은 양심도 없이 양학을 한다며 비난했지만, 레버쿠젠은 명색이 분데스리가 상위권팀이었고, 메시는 5골을 넣은 뒤, 양책의 가책을 느낀건지 이후 중원으로 내려와 볼 배급에만 집중을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로서 메시는 챔스 4년연속 득점왕 자리와, 최초 한 시즌 공격포인트 101포인트를 달성하는 선수가 됩니다. 세번째 발롱도르 또한 메시의 차지였습니다.
2012/13시즌
메시는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경기를 소화하며, 팀을 이끕니다. 메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커지자, 메시 의존증이 점점 크게 대두되었습니다. 비야와 페드로는 '그저 메시에게 고맙다.' 며, 미안함과 동시에 고마움을 내비쳤고, 로우라 코치는 '존재감만으로도 경기를 뒤집을 수 있는 선수'라고 그를 극찬합니다.
교체로도 출전하여, 57경기에서 24골을 기록하였습니다. 이 해 미친 활약은 여전했지만, 챔스 4강전에서 뮌헨에게 대패하자, 바르셀로나측에선 분노의 영입이 있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돌게 됩니다.
메시는 팀 전력이 약화된 상황 속에서 몸이 안좋았지만, 출전을 강행하고 싶다고 의료진에게 전달하였고, 강행을 하였습니다. 리그막바지 경기인 베티스전 팀이 1:2로 끌려가던 중, 교체로 나와 멀티골을 기록하며, 역전승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결국 시즌이 끝나고 91골로 한 해 역대 최다 득점을 달성하게 됩니다. 메시의 발롱도르 4년 연속 수상에 정점을 찍게 한 성적이었습니다.
2014/14시즌
브라질 월드컵을 확정한 메시는 그 해 시즌은 소속팀에 집중하면서 발렌시아전 전반에만 헤트트릭을 찍으며 리그를 시작 합니다.
아르헨티나가 이미 월드컵에 나갔지만, 협회장이 메시의 차출을 원했고, 국대와 소속팀을 병행하며, 뛰다보니 과부하가 걸리게 됩니다. 그러나 세비야전에서 후반막판 추가시간에 전광석화 드리블로 일순간에 경기를 뒤집으며, 세비야의 밀집수비를 괴멸시키는 명장면을 만들어 냅니다.
챔스 아약스전에선 헤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라울이 가지고 있던, 챔스 최다골 신기록에 한발 더 다가갔고, 고메즈와 인자기를 제치고 챔스 역사상 최다 헤트트릭 기록까지 보유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아틀레티코에게 챔스 8강에서 발목을 잡히는 바람에, 7년만에 4강진출이 실패되는 아픔을 맛보게 됩니다. 라리가도 준우승, 코파도 준우승하며 무관으로 끝마쳐야 했습니다.
메시 보인 신체능력이 정점을 달릴 시기에 참가한 2014 브라질 월드컵은 우승의 문턱에서 독일에게 일격을 당하며, 준우승에 머물게 됩니다. 아르헨티나 최고의 감독 사벨라까지 왔지만, 독일의 뢰브를 넘지 못했고, 대회 최우수선수에 선정되었음에도, 표정은 썩 좋지 못했습니다.
2014년 7월 여름 루이스 수아레즈가 1360억이라는 거액으로 바르셀로나로 오면서 메시-수아레즈-네이마르 라는 MSN라인이 완성 되었습니다.
전세계 5억명이 지켜보는 엘클라시코전 기대를 모았으나, 말년 병장처럼 어슬렁 그리는 메시에게 비난이 쏟아졌습니다. 리그무패도 날아가버리게 되자, 매번 엘클라시코에서 맹활약을 했던 메시였지만, 수아레즈 네이마르가 카르바할과 마르셀루에게 모두 봉쇄당해 메시를 힘을 쓰지 못했고, 실제로 메시는 발목통증에 진통제까지 맞아야 했습니다.
11월이 되면서 라리가 최다득점자리에 올랐고, 지난시즌 부진을 털고 폼을 회복합니다. 라이벌 호날두가 주춤하는 사이 메시가 한 발 더 나아가면서, 팀을 리그 선두에 올려 놓음과 동시에 자신은 득점 선두를 되찾게 됩니다.
챔스 4강에서 과거 자신의 스승이었던 과르디올라의 뮌헨을 박살내자 패장 과르디올라는 메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를 막을 수 있는 수비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언급합니다.
챔스 결승에서 트레블을 놓고 맞대결한 유벤투스 전에서 3:1로 만드는 쐐기골로 바르샤의 두번째 트레블을 달성을 하게 됩니다.
2015/16시즌
시즌이 열리기전 코파 아메리카에서 메시는 또 고통을 당합니다. 메이저 대회우승이 전무한 메시에게는 절박한 대회였고, 100번째 A매치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아르헨티나의 무질서한 조직력과 수준이하의 축구실력에 조별리그 1위를 달성하고도, 우승권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물론 메시는 4강 파라과이전에서만 3어시를 기록하면서 최고의 플레이를 했지만, 우승에 그토록 절박한 심정으로 뛴 첼레와의 결승전 승부차기에서 패하고 맙니다. 이 대회에서 메시는 MVP에 선정되지만, 수상을 거부합니다.
리그로 돌아와 7월말까지 푹쉬며 재충전을 하였고, 9월이 되서야 리그 마수걸이 골을 성공시키게 됩니다. 너무 빡빡한 일정 속에 메시의 컨디션에 문제가 생겨, 8주간 아웃되기도 했지만, 리그 경기에서 통산 라리가 300골을 만들었고, 엄청난 활약 속에 바르셀로나는 39경기 무패기록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무패기록이 호날두에 의해 깨지긴 했지만, 리그 1위를 유지중이었고, 3번째 트레블을 향한 질주는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챔스 8강에서 아틀레티코에게 패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라리가와 코파델레이 2관왕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메시 개인적으로는 호날두에게 내주었던, 발롱도르상을 3년만에 되찾아오게 됩니다.
국가대표 이야기를 말하면 또 슬프지만, 100주년 기념 코파에서 4경기중 3경기에서 MOM에 선정되는 등 이견없는 최고의 플레이를 펼칩니다.
바티스투타가 가진 역대 아르헨티나 최다골까지 깨트리면서 결승에 안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결승상대 칠레와 리벤지 매치에서 또다시 패하면서 인터뷰에서 국대 은퇴를 발표를 해버리게 됩니다.
물론 국민적인 성원으로 다시 복귀하였지만, 당시 메시의 정신적인 데미지는 한계치를 넘어버린 상황이었습니다.
2016/17시즌
라리가 37골로 득점왕에 오른것을 비롯하여, 시즌 총 54골로 유럽전체 1위였지만, 바르셀로나 엔리케 감독의 마지막 시즌은 아쉬운 실패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팀은 혼란스러웠지만, 메시는 자신의 역량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며 팀에 헌신했고, 팬들 앞에서 셔츠를 들어올리는 셀레브레이션으로, 또 다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을 합니다.
2017년 여름 네이마르가 파리생제르망으로 떠나고, 수아레즈까지 부상으로 이탈한 가운데, 메시의 어깨가 무거워 집니다. 챔스 8강 탈락, 리그 무패우승 실패등 메시에겐 아쉬운 한 해 였지만, 챔스 100호 골 고지를 밟은 후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모든 커리어의 끝판격인 월드컵 우승만을 남겨놓은 메시였지만, 부담감으로 인한 벽에 스스로 갇히게 됩니다. 4년간 3번의 결승전에서 패한 데미지는 컸었습니다. 이번엔 프랑스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16강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사실상 마지막 월드컵이 될거란 예측에 대해 메시는 '우승할때까지 은퇴는 없다'며 일축을 합니다.
아쉬운 월드컵을 뒤로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온 메시는 새시즌 준비에 박차를 가합니다.
그리고 2019년 5월 메시는 개인통산 10번째 리그 우승과 클럽 600호 골을 달성합니다. 이 기록이 의미가 있는 것은 21세기 바르샤의 리그우승에 모두 메시가 함께 했었다는 것입니다.
메시의 개인 수상 타이틀 갯수만 199개 입니다. 메시의 영향력은 이제 바르셀로나를 넘어서, 클럽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으며, 2020년 마침내 라이벌 호날두와 챔스 우승 핵심이던 2위 반다이크를 누르고, 통산 6번째 발롱도르 수상에 성공합니다.
리그 득점왕과 유러피안 골든 슈, 피파 올해의 선수 상까지 사실상 메시가 독식한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2020년 라리가는 일시적으로 멈추었지만, 메시는 레알의 벤제마를 따돌리며 유력한 득점 1위에 오르게 됩니다. 거기에 도움도 12개를 올리면서 라리가 유일의 도움 두자릿수를 선수에 스스로의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2004년 성인무대에 데뷔해 이제 만 32살이 된 메시,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아르헨티나 국가 대표팀을 이끌고 메이저 대회 우승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이고, 이 순간도 역사를 창조해 나가고 있는 작은 거인인 리오넬 메시.
우리는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가? 라는 물음에 우리는 '리오넬 메시'라는 이름으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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